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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맹장 백인엽과 한국검도 <경인일보/김재일 경기도검도회>
작성자
경기도체육회
작성일
2014/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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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장 백인엽과 한국검도 



 
2013년 12월14일 맹장 백인엽 장군님이 타계하셨다. 백 장군님과는 별난 인연으로 그분의 떠나심은 내게는 너무 큰 충격이다.


신문들은 노환으로 별세했다지만 필자의 추측은 그것이 아니다. 군인 백인엽 장군은 늙을 분이 아니다. 그 피땀 흘려 지어 놓은 학교가 자신의 손을 벗어난 울분과 지난해 8월 해체한 인천체전(인천전문대·선인체육관) 체육관이 결정적 충격으로 전달됐을 것이다. 그 충격에 의한 화병(火病)으로 타계 하신 것이다.


1973년 인천체전 검도부를 창단하고 전국을 석권하면서 혜성처럼 등장한 지도자 전동욱 선생의 뒤를 이어 필자가 맡게 되었다.


까다로운 백 장군의 휘하에서 1년을 더 못 견디고 전동욱 선생은 도중하차 한 것이다. 당시에는 검도 종목이 유일하게 대학에 존재한 곳이 바로 인천체전 뿐이었다. 필자는 당시 6단으로서는 최고참으로 1974년 10월31일자로 근무하게 됐다.


백 장군의 학교지도 생활은 듣던 바대로 퍽 힘들었다. 그분의 특이한 인상이 전쟁의 와중에 있는 듯한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데 놀랐다. 아무리 웃어도 그분의 눈빛은 사방 어디에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는 전쟁터의 경계심으로 가득 찬 눈빛이었다.


우리나라 역대 장군 중에 안광이 별나게 빛나 바로 바라보기가 두려운 장군이 남이 장군이라 했다. 바로 그런 눈빛이었다.


6·25 때 이승만 대통령의 가장 큰 신임을 받았다는 그는 용맹무쌍한 전투전과를 올린 장군이었다.


특히 일본서 발간한 6·25전사에는 허다한 우리나라 장군들을 소개하면서 유독 백인엽 장군만 맹장이라 표현돼 있다. 특히 그의 악명(?)을 날리던 여러 여건이 별로 호평을 받지 못하던 사회 분위기였다. 그는 전장 터를 누비듯이 하루종일 지프차를 몰면서 공사 현장을 뛰어다녔고 학교설립에 진력했다.


그가 2년제 체육 대학을 세운 그 시점은 진부한 4년제 체육대학 교육시간의 단축을 의미하는 성격도 있었다. 삽시간에 걸출한 체육 신인들이 대거 입학하기도 했다. 특히 비인기 종목의 검도는 당시 전문 선수 육성의 대학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이는 체육 세계 최초의 검도 선수 육성의 대학교가 되기도 했다. 특히 한창 공사 중인 학교 넓은 공터에는 채석장, 자갈더미, 모래더미, 300 계단 등이 있어 체력 훈련하기에는 더 없이 좋았다.


인천체전 검도부는 이후 한국 검도계에 큰 족적을 남기는 선수, 지도자를 배출하게 된다. 이들 졸업생들이 배출한 선수들은 세계적 선수를 비롯한 국가대표 선수들이 허다하다. 그리고 각급 학교 실업팀 감독으로 한국 검도사에 길이 빛나는 족적을 남긴다. 이 모두 백 장군이 펼쳐 논 체육 마당에서 일구어 낸 결과다.


늦게 장군님의 부음을 듣고 문상도 못한 죄 용서 받을 길 없음에 더욱 비통하다. 이렇게 추모의 글발이라도 남기면서 내 자신을 위로한다.


한국 검도계에 끼친 공로 적지 않음에 다시 한 번 정중하게 명복을 비는 바이다.


존경하는 백인엽 장군님! 지나간 모든 일들이 모두 꿈만 같습니다. 이제 편히 잠드소서.


김재일 경기도검도회장 검도 범사(範士) 검농


<경인일보 2014.0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