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대리 아이디어 누가 죽였나”
삼성, ‘창의 살리기’ 추리극 사내방송 화제
“경쟁 회사의 대박 상품은 1년 전 우리 회사 이◆◆ 대리가 냈던 아이디어를 그대로 사용했다. 누가 우리 아이디어를 죽였는가. ”
삼성그룹이 최근 전체 계열사에 내보낸 방송 내용이다.
추리극 형식으로 만든 이 프로그램에는 수사관이 등장해 아이디어를 죽인 범인(창의적 조직문화를 갉아먹는 요인)을 하나 하나 밝혀낸다.
수사관은 먼저 이 대리가 아이디어를 낸 1년 전 회의 모습을 재구성한다.
증거는 직원들의 증언과 팀장인 강◆◆씨의 회의 노트에 남겨진 흐릿한 메모 등이다.
1년 전 삼성 계열사의 한 회의실.이 대리는
“A 제품에 움직임을 감지하는 기능을 넣으면 어떨까요”라고 제안한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 팀장은
“예전에 나왔던 아이디어야.현실적으로 불가능해.개발비용도 많이 들고…”라며 일축한다.
그래도 이 대리는 “아무도 하지 않았던 시도이니 한번 해보시지요”라고 맞선다.
강 팀장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개발할 시간은 있나? 상무님은 그런 기능은 별로 안 좋아해”라고 못을 박아버린다.
그걸로 끝이었다. 강 팀장의 ‘미리 안 될 것이라고 판단한 고정관념’이 아이디어 살해의 첫 번째 용의자로 지목된 것이다.
수사관은 이 대리의 직속상관인 정◆◆ 과장도 용의선상에 올려 놓고 추적한다.
수사관은 정 과장을 불러 “당신이 이 대리의 아이디어를 묵살했지요?”라고 추궁한다.
정 과장은 “절대 그런 일 없었습니다”고 잡아뗀다. 수사관은 당시 이 대리와 정 과장이 주고 받은 메일을 증거로 들이댄다.
정 과장의 자백과 직원들의 증언을 통해 재구성한 장면은 이렇다.
이 대리는 제안을 담은 메일을 보낸 뒤 정 과장에게 가 “메일 보셨죠? 그렇게 한번 해보시죠”라고 말했다. 정 과장은 잠시 고민한 뒤 “지금은 때가 아니야.옆팀은 실적이 안 나와 공중분해됐어.당장 눈에 보이는 실적이 안 나오면 곤란해”라며 접으라고 조언했다.
대화가 오가는 도중 옆팀에서는 노◆◆ 수석이 짐을 싸고 있었다.
이 대리가 다가가 “수석님 뭐하세요?”라고 묻자 노 수석은 “나 MIT(매사추세츠공대)로 돌아갈래”라며 고개를 떨군다.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 회사 분위기’가 아이디어를 살해한 용의자이자 인재를 내쫓는 요인이었던 것이다.
세 번째 용의자는 같은 팀 동료였다.
최 대리는 “이 대리가 혼자 기획서를 쓰고,개발하고,다른 팀의 협조를 구하면서 힘들어 했다. 그러나 내 아이디어도 아닌데 뭐하러 도와주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자백했다.
다른 직원들도 “아이디어가 채택되면 일만 많아진다고 생각했다”고 털어놓았다. 아이디어 제안을 독려하는 문화의 부재(不在)가 세 번째 용의자였던 셈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좋은 아이디어가 죽은 것이라고 추리극은 결론을 내린다.
김용준 기자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