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넘어 요트·항공산업으로 질주 … 10년 뒤 한국 생각 하니 전율
[중앙선데이] 입력 2010.11.02 14:45 / 수정 2010.11.02 14:53
12일 아시안게임 열리는 중국 굴기의 현장, 광저우시를 가다
프린트 메일로보내기 내블로그에 저장”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1> 세계 최고 높이(600m)의 송출탑인 광저우타워(廣州新電視塔·캔튼타워) 앞에서 바라본 광저우아시안게임 개·폐막식장. 광저우 시내를 가로지르는 주장(珠江·펄 하버) 지류의 작은 섬인 하이신사(海心沙)에 위치해 있다.
<2> 중국 광둥성에 본사를 둔 가전제품 업체 미디어(美的·Media)의 신사옥 내부 쇼룸을 중국인 소비자들이 돌아보고 있다.
<3> 캔튼타워의 433.2m 지점(108층)에 자리 잡은 전망대에서 중국인 관광객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광저우=김동호 기자
비행기에서 내려 호텔로 이동하는 동안 ‘촌놈’처럼 어리둥절해 해야 했다.
눈앞에 펼쳐진 중국 굴기(떨치고 일어남)의 위용이 생각보다 대단했기 때문이다. 광둥성(廣東)의 중심도시 광저우(廣州)의 관문인 바이윈(白雲)공항에서 샹그릴라 호텔까지 늘어선 마천루는 뉴욕을 뺨칠 정도였다.
제16회 아시안게임(11월 12~27일)을 유치한 광저우시는 10월 19~24일 아시아 주요 언론을 초청했다. 광저우시가 5박 6일 동안 40여 명의 기자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건 그러나 아시안게임 준비상황이 아니었다. 경제 발전의 현장이었다.
다양한 첨단 제조업과 산업시설을 공개하면서 용틀임하는 중국의 위상을 낱낱이 전하고자 했다. 광저우시의 의도는 성공했다. 기자는 전율을 느껴야 했다.
3년간의 도쿄특파원을 마치고 최근 귀국한 기자는 그간 중국의 실체를 접하지 못했다.
그저 일본의 많은 전문가의 시각에 기대 중국을 들여다봤을 뿐이다.
활력을 좀 잃었다지만 일본 경제는 자부심이 강하다. 세계 최고의 기술력에 대한 자신감이다. 대부분 일본 교수는 “중국은 아직 멀었다”고 진단해 왔다. ‘저가 상품 제조공장’이란 인식을 바꾸지 않았다.
하지만 기자가 이번에 확인한 중국은 달랐다.
일본 주류 경제인·학자들의 생각은 잘못됐다. 우물쭈물하다간 한국이 중국에 덜미를 잡히는 상황이 곧 올 수 있을 것이란 위기감이 들었다. 기자는 10년 전 일본을 보고 일본 소니가 한국 삼성에 따라잡힌 이유는을 썼다. 10년 뒤엔 ‘한국 삼성이 중국 가전에 따라잡힌 이유’를 써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광저우시 탐방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한국 추월 준비 끝낸 중국 제조업
중국은 광둥성의 발전상을 보여주기 위해 다양한 분야의 제조업과 산업시설을 공개했다.
이를 통해 기자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 3월 현직으로 복귀하면서 “앞으로 10년 내에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은 대부분 사라질 것이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밝힌 배경이 무엇인지 바로 이해하게 됐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던가.
첫날 방문한 초박막 화상 전문업체 브이트론(VTRON)을 둘러보자 중국의 저력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광저우의 하이테크산업개발지구에 입주한 브이트론은 설립된 지 8년 만에 세계적인 기업이 됐다. ‘비디오 월(벽)’로 불리는 대형 비디오 스크린 제작 기술을 갖고 있는 이 회사 제품이 이미 한국의 대형 기업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됐다.
한국이 IT(정보기술) 강국이라는 구호가 무색해지는 순간이었고 10년 후에는 한국이 먹고살 게 없다는 우려가 괜한 걱정이 아니란 것도 실감했다. 중국이 IT 분야에서도 크게 도약하면 한국 기업들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10여 개 동남아 국가에서 온 취재진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LED 초박막 디스플레이 응용기술이 흉내를 내는 단계를 넘어 종주국인 한국이나 일본의 수준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해외판매 담당 매니저인 니콜 황에게 설립 8년 만에 고속 성장을 이룬 비결을 물었다. “우리는 세계 각지에서 최고의 전문인력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단축 성장이 가능했다.” 미국에서 최첨단 기술로 무장한 인재가 대거 중국으로 돌아왔다는 설명이다.
일본도 초기 단계인 여객기에도 손대
IT 기술은 약과였다. 광둥성 남부 주하이(珠海)에 자리 잡은 상업용 요트회사 선버드요트는 아예 충격이었다. 지난 22일 작업장에서는 200여 명의 숙련공이 능숙한 솜씨로 요트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겉모습만 봐서는 007영화에 나오는 고급 요트와 다를 바 없었다.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도 장착돼 있었고 요트 내부로 들어가니 고급 호텔을 뺨치는 인테리어와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승선 인원이 2~298명으로 다양한 이들 요트의 90%는 중국 내에서 판매되고 있다.
공장 간부에게 시장 전망을 묻자 “앞으로는 아시아 시장에서 판매를 강화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고부가가치 요트까지 중국이 접수하겠다는 의미로 들렸다.
이어 방문한 주하이 항공산업원은 기자를 주눅들게 했다. 이곳에선 중소형 여객기 조립은 물론 항공 부품의 제조·수리까지 이뤄지고 있었다. 이를 기반으로 주하이는 아시아의 항공허브(거점)로 도약한다는 계획도 갖고 있다. 공장 간부는 “시장이 빠르게 커지고 있는 동남아국가연합(ASEAN)과 한국·일본의 중간에 위치한 지정학적 이점을 최대한 살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 순간 기자의 머릿속에는 3년 전 나고야(名古屋)의 미쓰비시(三菱)중공업 견학 당시가 떠올랐다. 미쓰비시중공업은 일본 항공산업의 숙원인 일본형 소형여객기(MRJ) 개발에 국가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하는 일본도 몇 년 전에야 어렵게 일군 여객기 산업이 중국에서는 이미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중국 경제의 저력을 결정적으로 과시한 것은 광둥산업설계센터(GIDC)였다. 중국은 이곳에서 가전제품은 물론 휴대전화와 생활용품, 전자제품 등 모든 공산품에 대한 디자인을 하고 있다. 진품을 대충 베껴 짝퉁을 만드는 곳이 아니었다. 쾌적한 근무환경을 갖춰놓고 홍콩·일본·독일 등 해외의 디자이너를 대거 영입했다.
동남아 언론사 간부들 “투자해 달라” 간청도
중국이 제조는 물론 디자인까지 완전 공정을 구축한 현장을 목격하면서 기자는 도쿄를 다시 떠올렸다. 지난해 11월 일본 언론들은 소니·파나소닉·도시바 등 자국의 기업들을 거칠게 몰아세웠다. 일본의 주요 전기전자 회사 10개사의 순이익을 모두 합쳐도 삼성전자 한 곳에 미치지 못한 것으로 나오자 일본 언론들이 정색하고 일본 기업들에 회초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은 삼성전자와 LG전자의 경쟁력을 특집 분석하면서 일본의 완패를 인정했다. 그러면서 한국 업체들의 강점을 제시하고 일본 기업들의 분발을 촉구했다.
한국에서는 샴페인을 터뜨리는 분위기도 일부 있었다. 하지만 중국의 굴기를 목격하면서는 정반대였다. 곧 한국이 중국에 추월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좀체 지울 수 없었다. 이런 불안감이 절정에 달한 것은 미디어(Media·美的)그룹을 방문했을 때였다. 본사의 쇼룸은 한국 가전업체의 전시장에 와 있다는 착각을 들게 했다. 디자인이 삼성전자와 LG전자를 쏙 빼닮아 겉만 봐서는 구분이 불가능했다.
차이나 데일리 기자인 쉬샤오는 “집에서 오래전부터 미디어 제품을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광둥성을 돌아보는 과정에서 일부 후진국 출신 언론매체의 간부급 기자들이 광둥성 정부 관계자들과의 간담회에서 자신들의 나라에 투자해 달라고 읍소하는 광경도 자주 목격됐다. G2로 도약한 중국의 굴기가 절정기로 접어들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었다.
광저우=김동호 기자 dongho@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