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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일산 강선마을-심경당-춤추는 경로당
작성자
최종석
작성일
2010/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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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수업·명사특강… “경로당이 변했어요”고양=최종석 기자 comm@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기사 100자평(0) 입력 : 2010.01.19 00:40

일산 강선마을 ‘심경당’

김만규·조원정 명예교수 부부 지난해 4월부터 ‘변신’ 주도
답사·야유회 통해 친목도 다져 화투치던 곳이 ‘문화센터’로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언니~ 생일 축하합니다.”

18일 오후 3시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주엽동 강선마을 2단지 경남아파트 경로당. ‘심경당(尋敬堂)’이란 간판 아래에서 아파트에 사는 노인 40여명과 주민 10여명이 생일상을 차리고 있었다.

이번 달에 생일을 맞은 노인 6명이 115㎡(35평) 거실 한가운데 종이컵 안에 놓인 촛불을 함께 껐다. 같이 생일상을 받은 김판임(74)씨는 “집에서도 못 챙겨주는 생일상을 아파트 동네 주민들에게 다 받았네요”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아파트 입주자대표회 관리이사인 문광술(63)씨와 부녀회 회원 7명은 식탁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시루떡과 귤을 수북이 늘어놓으며 마냥 기쁜 표정이었다.

심경당은 매달 셋째 월요일마다 그달에 생일을 맞은 노인들을 위해 아파트 주민들과 함께 잔칫상을 차리고 있다. 구청에서 나오는 경로당 보조금을 쪼개서 준비했다. 매달 나오는 쌀 20㎏을 들여 시루떡을 만들었고, 입주자대표회와 부녀회에서도 귤 2상자를 들고 찾아와 축하했다.

이런 생일잔치는 1년 전부터 열리고 있다.

경로당 회장 한희수(79)씨는 “그동안 경로당은 몇몇 노인들이 화투나 치고 소일하는 곳이란 이미지가 강해 많은 노인들은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며 “회원들의 동의를 얻어 구청에서 나오는 보조금을 경로당 문화를 바꾸는 데 쓰기로 했다”고 말했다.

▲ 18일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주엽동 강선마을 2단지 경남아파트 경로당‘심경당’에서 주민 50여명이 이달 생일을 맞은 노인 6명을 위해 시루떡과 귤을 차려놓고 축하하고 있다. /김건수 객원기자 kimkahns@chosun.com

심경당이 단순한 노인정이 아니라 주민 모두가 모이는 동네 문화센터로 변신한 것은 김만규(71) 인하대 명예교수와 부인 조원정(71) 연세대 간호대 명예교수의 힘이 컸다.

지난해 4월에는 경로당에 ‘건강·행복·웃음을 나누는 모임’을 결성했다. 매달 첫째 월요일에 김 명예교수가 직접 강연을 한다. 칠순 노인이 2시간씩 지금까지 9번을 ‘강행군’했다. 강연 때마다 나눠주는 7~9쪽짜리 자료에는 노인들을 위한 건강상식·애창가요·유머가 빼곡했다.

“매주 대학교 동료 명예교수들과 점심을 먹으며 강의내용을 의논해요.
건강에 대해서는 의대 교수의 도움을 받죠.
아파트마다 나 같이 현직에서 물러난 전문가들이 있는데 그 경험을 조금씩만 나누면 돼요.”

조 명예교수는 “아파트 게시판에 공고문을 붙이는 것 빼고는 따로 홍보도 하지 않는데도 경로당이 매번 주민들로 가득 찬다”며 “다른 아파트 어르신들도 찾아온다”고 말했다.

심경당은 경로당답지 않게 명사 초청 강연을 열기도 한다.

이래저래 알게 된 인맥을 적극 활용했다.

재작년 10월에는 연세대 이성호(64) 교수가 ’21세기 자녀교육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특강을 했는데, 노인보다 주부들의 인기가 많았다.

노인 40여명과 주부 50여명이 경로당을 가득 메웠다.

이 교수는 “경로당에서 특강을 하기는 처음”이라며 “봉사하는 마음으로 방송에서보다 더 열강했다”고 했다.

그해 12월 ‘노인 건강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강의를 했던 일산병원 가정의학과 박성배 전문의는 “복지관에서도 특강을 많이 했지만 이곳만큼 어르신들이 질문을 많이 하는 곳은 없었다”며 “강의할 맛이 났다”고 했다.

봄·가을 답사와 야유회를 통해 친목도 다졌다. 지난 4월에는 개심사, 해미읍성, 윤봉길 의사 생가를 답사했다. 9월에는 경기도 연천군에 있는 주말농장에서 풋고추를 따고, 동네 3㎞를 도는 ‘노익장(老益壯) 걷기 대회’도 3번이나 열었다.

경로당을 찾는 노인도 1년 사이 5배로 늘었다.

2008년 9월 12명이었던 회원이 지금은 63명이다.

이 아파트 620가구에 사는 노인 100여명 중 60% 이상이 가입한 것이다. 1년에 650여만원이던 경로당 예산도 2배가 늘었다. 구청에서만 받았던 지원을 다변화했기 때문이다. 입주자대표회와 부녀회도 지원금을 보태고 일부 회원들은 자비를 내기도 한다.

명사강연이 호응을 얻자 무료 강연을 하고 싶다는 주민들도 생겨났다. 이 아파트에 사는 치과의사 김성택씨는 “어르신들도 저렇게 나서는데…”라며 치아관리 특강을 열고, 위생용품인 치실 70개를 무료로 나눠줬다.

노인들도 아파트 입주민 전체에 도움이 되는 일에 발 벗고 나섰다.

아파트 홍보 브로슈어를 2000부 만드는 등 재작년부터 입주자대표들을 돕고 있다.

입주자대표회 감사 남궁견호(69)씨는

“그동안 우리 동네를 알리고
생활정보도 담은 홍보 브로슈어를 만들려고 했지만

자금이 부족하고 일손이 모자라 번번이 무산됐었는데,

어르신들이 함께 글을 쓰고,

잡지 만든 경험이 있는 주민들이 힘을 모아 결실을 거둘 수 있었다”고 했다.

부녀회 회장 한애란(40)씨는 “심경당 어르신들은 삭막한 아파트에서 사람 사귀는 맛을 느끼게 해 주는 우리 동네 자랑”이라고 했다.

김 명예교수는

“어르신들이 교차로 등지에서 교통지도 하고 길거리 청소봉사 하는 것도 좋지만 사실 위험한 데다 ‘노인들은 단순한 일밖에 하지 못한다’는 잘못된 편견을 심어줄 수도 있다”며,

“주민들과 함께하는 문화봉사로 어르신들 스스로 자존감도 높이고, 경로당을 주민 여가·문화공간으로 만들어 어르신들도 지역사회에 공헌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