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자유게시판

자유게시판

제목
정조 화성 : 노무현 세종시
작성자
권영빈
작성일
2010/02/07
파일첨부
첨부파일없음

정조의 화성 vs 노무현의 세종시 [중앙일보] 기사

나도 한마디 (22)
2010.02.04 20:15 입력 / 2010.02.05 03:51 수정

관련핫이슈
[2010년] 중앙시평[2009년] 중앙시평왕조 시대의 군주와 민주 시대의 대통령을 단순 비교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정조 이산과 노무현 전 대통령 간에 상당한 유사점과 극명한 차이점을 동시에 보고 있다.

우선 정치 지도자로서 처했던 상황이 매우 흡사했다.

주류 세력에 휩싸여 비주류의 간난과 신고를 뼈저리게 체험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개혁과 변신을 거듭하면서 수도 이전 또는 신도시 건설을 계획했던 게 두 사람의 공통점이다.

정조 나이 11살 때, 아버지 사도세자가 노론 벽파와의 갈등 속에서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죽는 비참한 사건이 일어난다.

주류 세력이 아버지에게 가한 이 끔찍한 비극이 아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통한으로 자리 잡는다. 왕이 되자 아버지 묘소를 수원 남쪽 화산으로 옮기고 13차례 묘소를 찾는 원행(園幸)을 한다.

규장각을 신설해 계급과 신분을 뛰어넘는 인재 등용을 하고 신주류 세력을 꾸준히 확보해 나가면서 친위부대인 장용영(壯勇營)을 신설해 왕권을 강화했다.

마침내 정조 18년(1794년) 수원을 화성으로 고치고 묘소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신도시 건설에 착수해 2년7개월 만에 5.74㎞에 이르는 아름답고 견고한 성곽을 쌓고 수십 채 행궁을 건설한다.

노무현 정부의 등장은 주류 아닌 비주류, 보수 아닌 진보, 우파 아닌 좌파의 집권이라는 점에서 다른 어떤 정권과도 차별화된다.

노 정권은 집권 초기부터 주류 보수 우파에 대한 공격으로 출발한다.

“친일 군부세력이 3대를 떵떵거리며 산다”
“유신잔재는 박물관으로 가야 한다”에서 ‘신5적’이라는 유행어까지 등장했다.

정권이 의도했든 아니했든 노 정권 5년간 이 5대 세력은 개혁 대상이었다.

강남은 보수세력의 결집처고 전국 땅값의 진앙지다.
종부세 폭탄이 이곳에 떨어졌다.

정권이 아무리 바뀌어도 권좌엔 언제나 서울대 출신이 자리 잡는다.
정권 내내 서울대 폐지론이 등장했다. ‘

꼴보수 언론’인 조·중·동은 혁파의 대상이었고
말도 안 되는 신문법으로 이들에 재갈을 물렸다.

취임 초 젊은 검사들과 대통령이 아슬아슬한 대화까지 나누면서 집권 기간 내내 검찰과 법원은 개혁 대상에 올랐다.

삼성을 위시한 대기업들은 정경유착의 의심에 찬 감시 눈초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주눅이 들었다.

수도 이전으로
“재미 좀 봤다”고 노 전 대통령
스스로 말한 적 있지만 천도론이
이런 잔재미에서 시작된 게 아닐 것이다.

서울 중심 구세력을 확 갈아엎고 새 수도의 새 세력으로 나라를 이끌어 보자는 거대한 틀 속에서 천도론이 나왔다고 본다. 이 계획이 위헌으로 결정 나자 변형 수도분할이 오늘의 세종시 원안이 된 것이다.

다시 정조로 가자.

정조는 아버지를 극악하게 죽인 노론 벽파에 대해 그 어떤 보복도 하지 않았다.

벽파의 좌장인 심환지가 병이 났다. 정조는 친서를 내려 따뜻하게 위로한다.

남인 중심의 새 주류세력을 만들어갔지만 구세력을 물리치지 않고 포용했다. 정조는 한양 천도 이후 최대 신도시인 화성을 건설하면서 왕의 친위부대인 장용영 외영(外營)을 세워 5000명 군사를 주둔시켜 수도 방어를 책임지게 했지만 그 어떤 행정부서도 옮기지 않았다.

정조의 꿈은 화성을 자급자족하는 낙원도시를 만드는 것이었다.

왕의 사재인 내탕금 86만 냥을 털어 노임까지 지불하면서 성곽을 쌓았고
화성 주변에 만석거 축만제 등 대규모 저수지를 파고
수리시설과 농장을 세워 당대 최고의 농업도시로 성장케 했다.

전국 각지의 상인과 장인들에게 세금 감면 혜택을 주고 화성으로 유치했다. 수원 북수동의 원명은 보시동(普施洞)이다.

전국의 8대 부자를 이곳에 모아 서민 소상인을 상대로 자본을 대여케 하고 상공업을 진흥케 했다. 크게 베푼 곳이라 해서 보시동이 됐다. 정조 13년 구읍 당시 수원부 가호는 244호, 인구는 677명이었으나 신도시 축성 이후엔 1만5000호에 인구는 5만5000여 명이라는 비약적 성장을 한다.

만약 정조가 자족형 아닌 정치군사도시로 화성을 만들었다면 인구 100만 명이 넘는 대도시 수원이 지금껏 잔존했을까. 정조의 사망과 동시에 정치도시 화성은 사라졌을 것이다.

주류 세력 척결을 위해 비주류가 파놓은 함정에 주류 정당이 빠져 허우적대며 자중지란을 일으키고 있다.

거대 주류 정당이 두 패로 갈라져 비주류의 주류 압박 작전에 제대로 놀아나고 있다. 100년 200년을 생각해야 할 국가 백년대계 앞에 이 무슨 연인 간, 모자(母子)간 신의 타령으로 세월을 허송하고 있는가. 자족 도시 화성에 올라보면 수도 분할 세종시에 대한 답은 저절로 나온다.

권영빈 경기문화재단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