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망하면 백성도 망한다”
74세에 의병 일으킨 최익현 [중앙일보] 기사
2010.03.21 19:15 입력 / 2010.03.22 00:53 수정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1833~1906·오른쪽)은 을사늑약 이듬해인 1906년 6월 의병을 일으켰으나 일본 쓰시마로 끌려가 단식투쟁 끝에 그해 12월 30일 귀천했다.
쓰시마로 끌려갈 당시 모습을 담은 사진은 올곧은 선비의 기개를 생생히 전해준다. (출처=『사진으로 엮은 한국독립운동사』, 눈빛,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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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 승패의 분기점이었던
쓰시마해전이 벌어지기 두 달여 전인 1905년 3월 21일.
친일개화파 정객 윤치호의 일기장은
유교 지식인 최익현이 황제와 일본 침략자들을 상대로 보여준 기개를 찬탄하는 글로 메워졌다.
“최익현이라는 위대한 원로가
황제에게 잘못된 정책을 바로잡으라는 상소를 올렸다.
황제는 갖은 방법으로 직언하는 그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권했다.
그는 경기관찰사로 임명하겠다는
황제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대신
가혹할 정도로 솔직한 상소를 올려 국정을 바로잡지 않으면
일본이 곧 나라를 집어 삼킬 것임을 밝혔다.
일본 공사관은 한국 정부가 처벌하지 않으면 그들이 그를 징벌하겠다고 위협했다.
황제는 물론 요구에 응하지 않았지만,
일본 헌병들은 다음 날 그를 공사관으로 압송했다.
그는 하야시 일본공사나 하세가와 일본군사령관에게
‘하야시란 놈, 하세가와란 놈 좀 보자’고 면회를 요구했다.
그의 용기에 일본인들마저 감복했다.
감동한 다카야마 헌병소령은
‘한국에 이런 사람이 50명이라도 있으면
독립이
공연한 말 이상의 무엇인가를 의미했을 것이다’고 했다.”
왕조의 명운이 기울던 그때. 뜻있는 선비들은 두 가지 길을 택했다.
하나는 “나라가 망하면 유교의 도 또한 망한다(國亡而道亦亡)”는 생각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에 저항하거나 자결해 지조를 지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라가 망해도 도는 망하지 않는다(國亡而道不亡)”는 생각에서 숨어살며 공맹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었다.
“변(을사늑약)을 만난 지 이미 여러 달이 되었건만,
토벌을 꾀하는 이가 왜 한 명도 없단 말인가?
임금이 없어지면 신하가 어찌 살아가며,
나라가 망하면 백성이 어찌 보전되겠는가?
가마솥의 생선은 머지않아 삶아질 것이며,
불타는 대청 위의 참새는 얼마 안 가 타 죽을 것이다.
결국 죽고야 말건대
어찌 한바탕 싸우지 않겠는가?
살아서 원수의 노예가 되는 것이
어찌 죽어서 충의의 넋이 되는 것만 하겠는가?”(‘팔도 사민(士民)에게 보내는 포고문’, 1906년 6월 9일)
전자의 길을 걸은 최익현은 74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순창에서 의병을 일으켜 적지 쓰시마에서 단식 끝에 순절했다.
물론 그때 그가 지키려 했던 것은
왕조와 유교적 가치였기에
시대착오적이었다는 비판을 면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를 기리는 이유는 둘일 것이다.
하나는 그가 기득권이 아닌 자신이 지키려던 가치를 위해 목숨을 던진 우리 역사상 희유(稀有)의 위인이기 때문이요. 다른 하나는 오늘 우리 시민 사회가 반대파 정객이나 침략자까지 고개 숙이게 하는 감동을 자아내는 큰 정치에 목마르기 때문일 터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