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세계 최고입니까
선우정·도쿄특파원 su@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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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우정·도쿄특파원 작년 초까지 살던 도쿄 쓰쿠다(佃)란 동네에 ‘우루시게이 나카지마(漆藝 中島)’란 상점이 있었다. 그릇·젓가락 등 칠제품을 만들어 파는 서민 주택가의 전형적인 구멍가게였는데, 좌판에 미끈미끈한 한천을 작게 썰어넣은 물그릇을 둔 것이 특징이었다.
이 구멍가게가 자랑하는 상품은 박달나무를 다듬은 ‘팔각저(八角箸)’. 이름 그대로 팔각 모양의 젓가락이다. 그런데 가게는 이 젓가락이 ‘무엇이든 집을 수 있는 세계 최고’라고 자랑했다. 한천 물그릇은 이 말을 증명하기 위해 놓아둔 것이다. 젓가락의 끝부분까지 아주 정교하게 팔각으로 깎아, 누구나 물에 젖은 한천을 집어낼 수 있도록 했다.
‘재미있다’고 느끼면서 구경하다가 가격에 놀랐다. 박달나무 재질에 따라 1만3000엔까지 받았다. 요즘 환율로 젓가락 한 벌에 18만원이란 얘기다. 또 한 번 놀란 것이 가게 주인이 11대째라는 얘기를 듣고서였다. 300년 전부터 자자손손 젓가락을 만들었다니, ‘세계 최고 젓가락’이란 얘기를 장사치의 허풍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한국이 휘청거리기 시작한 작년 10월, 세계 최고의 스시(생선초밥) 요리사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세계적 레스토랑 가이드 ‘미슐랭’의 최고 등급인 별셋 평가를 2년 연속 받은 초밥왕 미즈타니 하치로(水谷八郞)였다. 그에게 스시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생선과 쌀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일본이란 나라가 다시 저 멀리 느껴졌다.
그는 직접 생선과 쌀을 고르지 않는다고 했다.
“단골 어물전 주인이 생선을 골라주고, 단골 싸전 주인이 여러 산지의 쌀을 황금 비율로 섞어 준다”고 했다. 자신의 ‘니기리(握り·손으로 주물러 초밥을 만드는 것)’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어물전의 세계 최고 감별력과 싸전의 세계 최고 블렌딩(blending) 능력이란 인프라가 없었다면 세계 최고가 될 수 없다는 결론이었다. 미즈타니의 스시 집을 비롯해 모두들 구멍가게 수준이었다.
작년 7월 서울에 휴가를 갔다가 길바닥에서 낙담했다. 울퉁불퉁 울고 있는 중심가 도로, 이음새가 터진 동네 보도블록, 듬성듬성 주저앉아 빗물이 고인 포장도로. 지금 살고 있는 오기쿠보(荻窪)란 동네는 도쿄 변두리에 속하지만, 그런 도로를 만나기 힘들다. 일본은 도로를 만드는 막일꾼까지 세계 최고인가, 아니면 한국은 막일꾼조차 얼렁뚱땅인가.
지금 한국과 일본은 함께 경제위기를 겪고 있지만 내용은 정반대다. 일본은 ‘엔고(高)’, 한국은 ‘원저(低)’로 고민한다. 달리 말하면 일본은 과도하게 치솟는 국가 신용도, 한국은 과도하게 떨어지는 국가 신용도와 싸우는 것이다. 이것은 산업화 이후 일관된 흐름이었다. 1980년 2.6배였던 두 나라의 통화가치 격차는 지금 14배로 커졌고, 한국은 통화 교환 협정을 통해 일본에 또 큰 신세를 지고 있다.
우리는 늘 정치가 3류라서 그렇다고 탓한다.
하지만 일본 역시 정치가의 실력과 실적은 객관적으로 3류다. 일본에서 경험하면 오히려 젓가락 가게, 어물전, 싸전, 공사장 막일꾼의 자기 노력과 실력이 한국과 확연히 달라 보인다. 일부 정치가가 아니라 국민 모두가 나라의 현실에 책임이 있는 것이다.
밖에서 보면 한국은 여전히 미·중·일이란 불침항모(不沈航母)의 보호를 받는 돛단배 같은 신세다.
허장성세하지 말고, 남 탓도 그만 하고, 올해 좀더 쿨(cool)하게 각자 스스로 성찰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지금 한국은 10년 전 위기 때와 달리 자기 반성이 부족한 듯하다. 그래서 더 위험해 보인다.
입력 : 2008.12.31 23: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