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장막 뒤
올림픽 열기로 나라가 뜨거웠다. 4년만의 올림픽이니 즐겨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 우리나라는 엘리트 스포츠만을 위한 나라인데 오죽하랴.
스포츠가 아름다운 것은 사실이다. 진정으로 인간의 한계를 넘는 선수들의 투혼은 아름답지 않을 수 없다. 8월 16일자 중앙일보는 스포츠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굼브레히트’ 교수의 글을 소개하는 칼럼을 실었다. 그는 스포츠가 “순수하고 사심 없는 만족”을 준다고 말한다. 현상적으로 맞는 말처럼 보인다. 인간사에서 스포츠는 끝없는 대리만족을 제공하고 일상에서 느낄 수 없는 희열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유일한 엔터테인먼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솔직히 그의 이런 표현은 너무나 비현실적이다. 더욱이 “진리의 순간적이고 예술적인 현현” 운운은 현장의 전문가 입장으로 보면 지극히 피상적 관점이라는 생각 밖에는 안 든다.
결국 스포츠가 사심 없는 순수함과 진리를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과연 올림픽 스포츠는 진리만을 담고 있을까? 그것이야 말로 스포츠의 이상성을 나타내는 현학적 표현일 뿐이다. 드러나는 스포츠의 모습만을 표현한 것 뿐이다. 달빛아래 오물물이 흐르는 강을 보면서도 시인은 누구나 아름다운 시를 지을 수 있다. 수면 밑에 있는 오물을 볼 필요는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들은 나쁘다. 만일 오물의 냄새는 맡으면서도 그렇게 쓰고 있다면 그들은 너무 나쁘다. 그냥 교과서에 적힌 말이라면 모를까!
스포츠는 이런 시적인 소재가 아니다. 스포츠야 말로 더럽고 추한 인생사가 다 함축되어 있는 복마전의 삶의 현장일 뿐이다. 승리를 위한 더러운 담합과 거래가 언제나 숨어있고 순수함을 짓밟는 더러운 승부가 여전히 승리의 환호 속에 가려있다. 사심 없는 아름다움이 들어 있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추악한 뒷면이 있는데도 사람들은 오로지 올림픽의 환호만 즐기고 생각한다.
한발 더 나가서 손장환은 칼럼에서 올림픽에는 만 명의 스승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심판판정에 항의하며 메달을 던진 스웨덴 선수에게 인격을 바닥에 버렸다고 말했다. 데스크에 앉아 현장의 그늘과 그림자를 보지 못하는 그런 글쟁이들의 눈에 그렇게 비칠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그 선수의 인격을 밟을 정도로 올림픽의 아름다움을 즐기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 모두 다 썩은 달걀의 아름다운 빛깔만을 평하는지 모를 일이다. 왜 그의 눈에는 선수들의 피와 땀과 순수함을 짓밟는 편파판정의 추함은 보이지 않는지 모를 일이다. 국내에서 일어났던 그 수많은 편파 부정 판정의 사태들에서도 그는 배울것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결국 그 선수에게 진짜 편파판정이 일어났다는 그다음 보도는 어떻게 해야하나.
올림픽과 스포츠는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말하건데 현학적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움만을 말하는 사람들은 진정 올림픽과 스포츠의 아름다움을 알 수 없다. 올림픽은 수많은 선수들의 노력과 피땀을 밟고 그 위에 건설된 허구의 유토피아다. 선발전에서 이기고도 편파판정으로 승부에 져서 뼈아픈 심정으로 올림픽을 바라보는 선수들의 아픔을 짓밟고 세우는 허구의 축제다. 인생 자체가 허구라고 한다면 또 할 말은 없다.
올림픽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권력이다. 이제는 가장 큰 권력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대리 권력을 누리고 즐길 뿐이다. 엄청난 돈으로 포장되고, 진정한 승부보다는 상업적 승부가 판을 친다. 사람들은 그 권력과 부를 얻기 위해 하이에나처럼 달려들 뿐이다.
모든 아름다움은 추함에 대비되는 말이다. 올림픽의 아름다움은 수많은 추한 승부 뒤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진정으로 스포츠는 아름답고 스포츠를 통해서 우리는 인생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하기 위해선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먼저 그 속에 숨어 있는 아픔들과 비리와 추함을 질타할 수 있어야 한다. 아름다움을 누릴 줄만 알았지 그 아름다움 뒤에 있는 아픔과 추함을 외면한다면 영원히 스포츠는 허구일 뿐이다. 진정한 아름다움이 아니다. 아름다움에 대비되는 추함을 드러낼 줄 알아야 아름다움을 즐길 수도 있는 것이다.
스포츠와 올림픽이 사심 없는 아름다움을 지니려면 먼저 순수한 승부들을 전제로 이루어 져야 한다. 수많은 선수들이 올림픽을 위해 청춘을 바치고 있다. 금메달을 따는 한사람의 영광을 즐기기 위해 그 수많은 선수들의 눈물을 외면한다면 너무나 무책임 한 것이다. 아직도 여전히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는 엄청난 부정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냥 몇몇 진정한 스타들의 영광에 전부 묻혀 있을 뿐이다. 이제는 그 추함들을 들어내야 한다. 진정한 ‘사심없는 만족’ 원한다면 말이다. 장막이 있으면 언제나 앞뒤가 있다■
류 병관 용인대교수
<2008. 8.26 중부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