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텔라(주) 이은철 대표
올림픽 사격 금메달리스트에서 성공한 IT사업가로 변신
‘한국사격의 전설’ 이젠 ‘IT 사업의 전설’ 정조준
1980~90년대 한국 사격의 기린아로 84년 LA올림픽부터 2000년 시드니 대회까지 국내 선수 최다인 5회 연속 올림픽 출전과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남자 소구경소총 복사에서 금메달을 따낸 ‘한국사격의 전설’ 이은철씨(45·인텔라(주) 대표).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 획득 후 만 20년이 지난 현재 그는 연 매출 100억원을 바라보는 IT 사업가로 변신, 제2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사격선수 시절 ‘리듬사격의 달인’으로 아시안게임과 아시아선수권, 올림픽, 세계선수권을 모두 석권하며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던 이 대표는 IT 사업가로도 정상 과녁을 정조준하고 있다.
“꿈과 목표 설정, 그를 이루기 위한 열정이 있다면 어느 분야서든 성공할 수 있다”는 인생 철학을 바탕으로, 성공시대를 열어가고 있는 이 대표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후배 스포츠인들을 위한 장학재단 출범을 준비하고 있다.
공부하며 운동하는 스포츠인의 롤모델이 된 그를 만나 세계 최고의 총잡이에 오르기까지 과정과 IT 사업가로 펼쳐가고 있는 새로운 목표를 향한 도전을 들어봤다.
Q. 92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낸지 20년이 됐다. 당시 예선 8위로 결선에 턱걸이로 진출해 금메달을 따냈다.
A. 내 주종목은 소구경 3자세였는데, 금메달은 복사에서 땄다. 처음 올림릭에 나간게 1984년 LA올림픽으로 그 때는 너무 어려서인지 굉장히 긴장돼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반면 4년 뒤 88서울올림픽은 너무 준비가 잘 돼서 실패했다.
그만큼 기대감이 컸고, 그 기대감을 이기지 못한게 실패 요인이었다. 92년 바르셀로나에서 금메달을 딴 것은 내 주종목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주종목이 아니다보니 확실히 부담감이 덜했고, 경기 전에 세운 작전의 효과도 있었다.
소총은 무게감이 상당해 어깨에 견착하면 왼팔에 무게가 집중돼 피가 안통할 정도다. 이 때문에 대부분 선수들이 한발 사격한 후 총을 내리는데 그러다보면 조준점이 흐트러진다. 그래서 대회 시작전에 총을 내리지 말자고 마음먹었고, 결선 시리즈 동안 총을 한번도 내려놓지 않은 끝에 내 인생 최고의 점수(105.5점)를 쐈다.
Q. 88서울올림픽 이후 극심한 슬럼프를 겪은 것으로 아는데.
A. 앞서 말했 듯이 1988년 대회는 너무 기대를 많이 했다. 1987년에 실력이 최고조에 올라있었기 때문이다. 당시를 되돌아보면 1986~1988년은 내 인생에서 최고로 성실히 살았던 시기였다. 술, 담배는 커녕 카페인 때문에 콜라도 입에 안댔을 정도로 모범적인 생을 살았다.
그렇게 열심히 준비했는데 결과가 예선 탈락으로 나타나면서 실망감이 배 이상으로 몰려왔다. 차라리 술 마시고 담배피고, 그렇게 살았다면 덜 힘들었을 것 같다. 그 때 한 신문의 ‘휴지통’이라는 코너 가십 기사를 봤는데 ‘미국에서 온 이 아무개가 우승할거라면서 왔는데 우승은 커녕 예선에서 떨어졌다’는 내용이었다. 내 3년간의 노력이 휴지통에 버려진 기분이었다.
그래서 친구들과 한달 가까이 방황하면서 지냈다. 술도 태어나서 그 때 처름 마셔봤다.(웃음) 그리고 얼마 안돼 은퇴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학업에 전념, 대학 1,2학년 동안 C학점에 머물렀던 성적을 3,4학년 때는 거의 A학점으로 마쳤다.
이후 대한사격연맹에서 선발전 없이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표로 출전해달라는 연락을 받고 다시 총을 들었다.
Q. 사격선수에서 IT 사업가로 성공의 길을 걷고 있는데 비결은.
A. IT분야에 몸담고 있지만 성공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일이든 꾸준히 하면 성공할 수 있는 것 같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것보다 올림픽에 5회 연속 출전했다는 것에 더 의미를 두는 것과 같다. 그 기간동안 국내 최고 선수로서 기량을 유지했다는 뜻도 되기 때문이다. 사업도 이와 같아서 목표를 세우고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한다면 성공이 찾아온다.
여기에 한 가지 더 필요하다면 열정이다. 올림픽 5회 연속 출전 후 총을 내려놓은 것도 열정 문제였다. 한국은 목표의식이 한 곳에 집중돼 있다보니 목표를 달성한 순간 목표의식이 없어진다. 그래서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을 끝으로 은퇴한 후 IT쪽으로 목표를 다시 잡았다.
Q. ‘실리콘밸리테크’와 ‘인텔라’ 두 IT업체를 경영하고 있다.
A. 원래 전공이 컴퓨터공학이다. 중학교 때부터 미국에서 컴퓨터를 만졌다. 너무 하고 싶은 일이었는데, 사격 때문에 미뤘다가 2001년 실리콘밸리의 벤처업체에 엔지니어로 입사해 5년간 경력을 쌓았다. 2005년 12월 실리콘밸리테크를 차렸다.
실리콘밸리테크는 어떤 상품을 개발한다기보다는 미국과 한국 업체를 서로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는 중개 회사이며, 2008년 처음으로 나만의 아이템을 잡아 설립한 주식회사가 인텔라다. 인텔라는 이동통신사들이 사용하는 실내용 통합중계기를 생산하는 업체로, 올해 연매출 100억원을 바라보고 있다.
Q. 스포츠스타가 전문분야의 업종을 창업해서 성공한 사례는 드문데.
A. 운이 좋다고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어려서 텍사스에 살았는데 그 지역은 무조건 운동을 잘한다고 운동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여가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모든 과목을 C학점 이상 받아야 했다. 한 과목이라도 C학점 밑으로 떨어지면 점수가 복구될 때까지 다른 것을 못하게 했다.
운동선수라고 무조건 몸만 쓰는 교육 방식이 아니라 공부와 운동을 병행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란게 IT분야로 오는 길을 만들어 준 것 같다.
Q. 당시로는 드물게 초등학교 때 사격에 입문한 계기는.
A. 4학년 때 학교 성적 우수학생 6명이 인천으로 견학을 갔었다. 그 때 유원지에 들러 인형을 콜크 총알로 쏘는 사격을 했는데, 그 총이 참 맞추기 어렵다. 아마 지금 쏴도 못 맞출 것 같은데, 그 때는 이상하게 잘 맞아 친구들 상품까지 다 타줬다.
집에 와서 어머니께 자랑을 했는데, 얼마 뒤 어머니가 서울 경동시장에 있는 사격장에 날 소개해 주셔서 사격과 인연을 맺었고, 5학년 때 아버지가 처음 총을 사주시면서 본격적인 훈련을 시작했다. 1년 뒤 사격 유망주 조기 발굴 프로그램인 전국 어린이사격왕 선발대회에서 우승했다.
Q. 미국 유학시절 고등학교 때 내셔널대회에서 큰 사건을 일으켰다던데.
A.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가족이 모두 미국으로 건너갔다. 고교 1학년 때 미시간주 대회에서 7년간 패한 적이 없는 최고의 선수인 론스 위거를 이겼다. 하지만 시민권이 없어 공식 1등은 위거에게 내주고, 내게는 있지도 않은 상을 별도로 만들어서 줬다.
그 후 이름이 알려져 MIT 등 2개 대학에서 스카웃 제의를 받기도했다. 그러다가 1984년에 올림픽 참가 요청을 받으면서 세계적인 지도자인 래리 베쌈을 알게 됐다. 그런데 베쌈으로부터는 단 한번도 사격술을 배운 적이 없다. 베쌈은 나에게 사격술이 아니라 정신수양법을 가르쳤다.
의식과 무의식, 자아에 대한 수련법인데 우리말로 하면 삼위일체로 표현할 수 있다. ‘리듬사격’이라는 것도 결국 이 정신수련법에 기초해 사격시 매번 같은 생각, 같은 패턴을 유지하는 것이다.
Q.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신데렐라’가 된 강초현과는 의남매 사이로 은메달 획득에 큰 도움을 줬다는데.
A. 시드니 올림픽을 앞두고 처음 국가대표가 된 초현이와 한 조가 돼 대표팀 내에서 공기소총 남녀 혼합 경쟁을 자주했다. 당시 초현이는 부자집 딸처럼 해맑고 귀티가 났는데 실상을 알고보니 가정 형편이 어려운 가운데 꿈을 잃지 않고 노력하는 선수였다. 내가 초현이를 도운 것으로 알려졌지만, 선배로서의 경험을 준 것 뿐이다.
초현이가 올림픽 출전을 위해 호주로 건너갔을 때 점수가 평소에 비해 10점 정도 떨어졌다. 환경이 틀려지면 사격법이나 장비를 교정해야 하는데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감독에게 초현이 장비를 손볼 수 있게 맡겨달라고 부탁했고, 우여곡절 끝에 시합전날 총을 손봐줬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초현이가 399점을 쏜 것이다. 정작 나는 메달을 못따서 죄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인데도 너무 기분이 좋았다. IT사업을 하면서 스포츠 유망주 장학재단 설립을 준비하는 것도 어려운 여건에서 운동하는 선수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다.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할수도 있지만, 내가 직접 만들어서 남을 돕고 싶다. 현재 계획대로라면 3~4년 뒤 재단을 출범시킬 예정이다.
Q. 사업을 하면서 지난해 국제심판 자격증을 취득했는데, 뒤늦게 심판 자격증을 딴 이유는.
A. 재단 설립이라는 것은 결국 다시 스포츠계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사격이라는 종목은 누군가 꾸준히 투자를 해주지 않으면 안되는 종목이다. 지금은 나라에서 그런 역할을 하고 있지만, 그 분야가 발전할수록 투자는 줄어들게 된다.
국제 파트와 재정 문제에서 나중에 국가의 역할을 대신 해줄 민간단체가 많이 생겨야 되는데, 우선은 내가 그런 역할을 해야되겠다 싶어서 자격증을 땄다. 국제사격연맹 임원 자격에도 자격증은 필수다. 우리 선수들이 국제 사격계에서 불이익 받는 일이 없도록 앞장설 생각이다.
Q. 앞으로의 계획과 바람이 있다면.
A. 우리 때는 국가관이 뚜렷해서 모든 사람이 절제하고, 열심히 하고, 희생하고, 그런 것이 가능했었다. 하지만 지금 세대는 자기가 하고 싶어서, 자신의 열망을 기반으로 운동을 하는 세대다. 진종오 선수를 보면 늘 흐뭇하다. 사격적으로 보면 모든면에서 천재다.
이런 선수가 나온다는 것 자체만으로 흐뭇한 일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목표가 없는 선수가 너무 많아진 면도 있다. 천재도 나오지만, 목표의식이 없는 선수도 많아진 것 같다. 후배 선수들이 좀 더 목표의식을 갖고 살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또 개인적으로는 인텔라가 상장돼 사업이 정상궤도에 오르면 이후 전문경영인 체제로 전환하고, 재단 운영에 전력하고 싶다.(경기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