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남자의 경쟁력]⑥ 디자이너 최범석의 ‘자학’
17일 오전 5시 반.
서울 강남구 신사동 디자인실을 출발해 용산구 한남동 집으로 차를 모는 그의 손가락 끝이 운전대 위에서 춤을 췄다. 흥얼흥얼 자신도 모르는 나오는 콧노래에 맞춰.
일교차 때문인지 과로인지, 원인 모를 감기로 인해 몸은 괴로웠다. 코와 입 사이에 10㎏짜리 아령이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그는 그것을 즐겼다. 과로했을 때의 고통, 그리고 해방감.
모 스포츠용품사와 공동으로 진행하는 프로젝트 중 하나인 신발의 새 디자인 개발.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 밤새 쩔쩔매던 그에게 새벽녘에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일사천리로 디자인을 마쳤을 때 그는 비로소 ‘이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도 그는 승리했다. 그 자신에게.
▲영상취재 : 동아닷컴 박태근 기자
●계속 이어지는 ‘나와의 싸움’.
패션 디자이너 최범석(32). ‘제너럴 아이디어’라는 남성복 브랜드와 대중에게 어필하는 디자인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그의 일상은 늘 이런 식이다.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를 학대할 정도로 집요하게 노력하는 것에서 행복을 찾는.
그는 2003년 서울컬렉션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해 그 동안 11차례 컬렉션에 출품했으며 2006년 프랑스 파리 ‘프렝땅’ 백화점에 입점하면서 실력을 인정받았다. 올해에도 서울컬렉션의 오프닝을 맡았다. 2009년에는 미국 뉴욕 컬렉션 데뷔 무대를 준비 중이다.
올해 초에는 서울 예술종합학교 교수로 임용되기도 했다. 성적을 매기지는 않지만 한 달에 약 두 차례 학생들에게 디자인 특강을 하고 있다.
그의 이름 뒤에는 늘 따라붙는 꼬리표가 있다. ‘고졸 디자이너’, ‘동대문 출신’이 그것이다.
그는 그러나 단 한번도 학력이나 출신이 걸림돌이 된다는 생각을 해본 일이 없다. 그저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해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데만 관심을 기울였다.
스스로에게 가혹하리만큼 많은 일을 부여하고, 고통스럽게 그 일을 해낸 뒤 쾌감을 느끼는 버릇으로 인해 그는 ‘학력과 출신’이라는 한국 사회에서 넘기 힘든 장벽을 넘어설 수 있었다.
그는 “30대 초반 젊은 나이에 크게 성공했다”는 주위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지만 정작 자신은 여전히 스스로를 괴롭히며, 또 괴로워하는 자신을 보며 희열을 느낀다.
“주위에서 같이 일 하자는 제의가 많아요. 아, 이 일을 맡으면 또 잠을 제대로 못 잘 텐데, 걱정이 되면서도 안 해본 일을 해 보고 싶고, 부딪혀 보고 싶은 욕심에 또 그 일을 맡죠.”
절대로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양의 일을 밤새 마치고 귀가할 땐 ‘이 맛에 내가 산다’ 싶을 때가 있다.
“10㎞를 달리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12㎞를 뛰었을 때 느껴지는 뿌듯함, 아무도 안 알아주지만 나 혼자만 기분 좋은 것…, 그런 느낌이죠. 그런 게 제 삶의 원동력 같아요.”
●고3, 장사꾼이 되다
그가 장사를 시작한 것은 18살, 고 3때부터다.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는 따위의 꿈은 그때 없었다.
넉넉지 않은 가정형편. 돈이 필요했다.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옷을 택했다.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 100만원으로 의정부의 한 할머니가 운영하는 옷가게에서 구제 옷을 떼어다 홍익대 앞에서 노점을 차려놓고 장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깨끗이 ‘말아먹었다.’
부산에서 다시 돈을 모아 의정부에 가게를 차린 뒤 2년 만에 동대문에 입성했다.
천편일률적으로 같은 옷만 걸어놓고 파는 게 싫어 원단 제조업체 등을 다니며 공부를 시작했다.
‘오바로크’, ‘니혼바리’, ‘후레아’, ‘반도’, ‘쓰벙’ 등 공장의 ‘삼촌’ ‘이모’ 들이 사용하는 일본식 은어들이 정식 패션용어인줄 알고 열심히 배우고 외웠다.
‘삼촌’ ‘이모’들이 ‘프라다 원단’이라고 알려준 소재도 알고 보니 합포한 섬유의 일종을 가리키는 은어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디자인에 대한 감이 생겨나기 시작한 뒤였다.
동대문에서 장사를 시작한 지 2년쯤 지났을 때 그는 자신이 처음 디자인한 1만 원짜리 셔츠를 가게에 내걸어 보았다. 그게 대박이 터져 한 달 반 만에 순익만 1억6000만원이 남았을 때 잠시 ‘내가 소질이 있나보다’ 생각했다.
한동안 그는 동대문에서 ‘매출 1등 매장’의 주인으로 통했다.
2002년 파리 컬렉션을 구경한 그는 직접 옷을 만들기로 마음먹고 닥치는 대로 디자인 트렌드와 대중문화를 독학으로 섭렵하기 시작했다.
●”오르가즘을 느끼는 거죠”
그는 “이미 다른 매체에 나온, 성공스토리 얘기는 그만하자”고 말을 끊었다. “똑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은 괜찮지만 천편일률적인 게 싫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화제를 ‘오르가즘’으로 옮겨갔다.
그는 오르가즘을 “목표치에 도달했을 때의 느낌”이라고 정의했다.
동대문에서 옷 장사를 하던 시절, 그의 주위에는 옷 팔아 부자가 된 사람들이 많았다.
“저 사람 왜 이리 돈이 많아? 싶은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들이 내게는 큰 자극이었습니다.”
그들 못지않게 돈을 벌어본 뒤 그의 목표는 디자인에서 오르가즘을 찾는 것이었다.
압구정동에 매장을 내고 본격적으로 자신이 디자인한 옷을 팔기 시작했을 때 “이번에는 ‘압구정동 애들’이 무시하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그랬던 그들이 어느 순간부터 동업하자 그러고, 술자리에 부르고 하더군요. 그게 또 하나의 오르가즘 이었죠.”
파리, 뉴욕의 의류 유통업체들이 “제너럴 아이디어를 다루고 싶다”며 걸어오는 전화와 보내오는 이메일도 요즘 그에게 오르가즘이다.
“내년에는 뉴욕으로 진출할 겁니다. 그 때도 물론 오르가즘이 느껴지겠죠.”
●”가정을 갖고 싶어요, 하지만…”
스스로를 매섭게 몰아세우는 노력으로 지금 자리에 우뚝 섰지만 그의 갈 길은 아직 멀다.
“노력한 만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노력을 멈출 수가 없어요.”
하지만 그는 요즘 가끔 마음이 흔들린단다.
“우리 회사 이사님이 곧 둘째를 낳습니다. 세상에서 그 분이 제일 부럽습니다. 내 삶은 왠지 불안한 것 같고 안정적이지 못한데 그 분은 집에 가면 아내가 있고 아기가 있고….”
가족의 안락함이 부럽다가도 ‘남들이 다들 사는’ 평범한 삶의 방식에 자신을 대입해 생각하면 어색하기만 하다.
“주말에 ‘무한도전’을 보고 낄낄대고, 월요일이 되면 회사 가기 싫고, 그렇게들 많이 사는데 그게 맞는 삶인지 모르겠어요. 내 삶이 정답이 아니라고는 생각하지만 저는 성격상 그렇게 못할 것 같아요.”
그는 “내가 선천적으로 똑똑했더라면 이렇게까지 나 자신을 몰아붙이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요즘 잠이 오지 않을 때는 싸구려 와인을 한 잔씩 마신다. 늘 넘치는 일로 인한 불면증. 수면제도 먹어봤지만 “그 다음날 하루 종일 찌뿌듯해서 와인으로 바꿨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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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지만 나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이 먼저”라는 그는 “아직 소모할 체력이 많은 것 같다. 소모할 수 있을 때까지 소모해 보겠다”며 말을 맺었다.
나성엽기자 cp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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