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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뛰게 하자(중앙일보)
작성자
조윤제
작성일
2009/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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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읽고 뛰게 하자 [중앙일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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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교육제도는 어느 나라에서나 논쟁의 대상이 되어 있다. 선진국일수록 더 그렇다. 선거에서는 늘 단골 메뉴다. 그러나 지난한 것이 또한 교육개혁이다. 교육제도는 그 나라의 역사, 사회문화, 계층 간 갈등, 교직자의 이해관계 등 복합적 요인의 결과로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요새 외고가 도마에 올라 있지만 그야말로 무엇을 어떻게 건드려야 지금과 같은 문제점들을 개선할 수 있을지, 제대로 건드릴 수나 있을지 엄두를 내기 어려운 것이 교육제도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교육제도하에서도 우리나라의 중등교육을 개선할 수 있는 여지는 있어 보인다. 그것은 무엇보다 학생들에게 책 읽는 습관을 붙이게 하고 체육시간을 늘리는 것이다. 학업성취도로 볼 때 우리나라 중등교육은 성공적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국제학업성취도(PISA) 평가에서 우리 청소년들은 과학·수학에서 최상위를 차지한다. 하지만 이는 엄청난 비효율을 통해 이룬 성과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일주일에 공부하는 시간은 49.4시간으로 OECD 청소년들의 평균 33.9시간보다 15시간 이상 많다. 2003년 PISA 조사를 비교하면 핀란드는 평일 평균 전체학습시간이 4시간22분으로 우리나라(8시간55분)의 절반에 불과했으나 수학점수는 544점으로 2점이 높았다(한국 542점). 우리 학생보다 공부시간이 2시간33분 적은 일본(6시간22분)도 538점으로 큰 차이가 없었다.

하루 학습시간에서 두 시간을 떼서 한 시간은 독서지도, 다른 한 시간은 체육시간으로 돌릴 수는 없을까. 이는 공교육이 아니면 할 수 없다. 그 땅값이 비싼 강남의 중·고등학교 운동장은 텅 비어있고 이웃 사설학원의 작은 방 속에 책상을 다닥다닥 붙여놓고 밤늦게 앉아있는 학생들을 보면 안타까움과 함께 어른으로서 책임과 부끄러움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가 전력을 제대로 공급 못해 집집마다 발전기를 구해다 쓰는 아프리카 나라들에서나 보는 자원사용의 비효율성을 우리의 교육현실에서 본다.

중등교육의 목적은 지식습득뿐 아니라 인격의 함양과 장래 사회인으로서의 기본소양을 가르치는 것이다. 오늘과 같이 지식과 기술, 살아가는 방식이 빠르게 변하고 개인 삶의 지평이 넓어지는 세상에서 중요한 것은 학생들로 하여금 스스로 배우고, 평생 배울 수 있는 습관을 붙여주는 것이다. 독서 습관은 언제나 교육의 중요한 목표였지만 오늘날과 같이 인터넷과 게임산업의 발전으로 청소년들이 책을 외면하기 쉬운 상황에서 그 중요성은 더해진다. 교사나 부모가 가르쳐 주지 못하는 것을 책을 통해 배우는 습관을 길러주어야 한다.

체육이 중요한 것은 건강한 신체를 위해서만이 아니다. 스포츠를 통해 청소년기에 규칙을 지키는 것을 배우고 끈기와 협동, 자기절제를 배울 수 있다. 이는 사설학원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19세기 대영제국을 건설하게 한 원동력은 영국 중등사립학교의 스포츠 교육에서 나왔다고 한다. 럭비·축구·크리켓 같은 단체운동을 교육의 핵심으로 삼은 것이다. 이들 단체경기를 통해 신사다운 행동과 자기희생 정신을 습득하도록 했다. 어떻게 승리하는가와 더불어 어떻게 패배하는가를 배우는 것, 또한 초기의 실패에 좌절하지 않는 자질을 키우는 것은 스포츠건 공부건 돈벌이건 어느 영역에서건 중요하다. 웰링턴 장군은 ‘워털루 전투의 승리는 이튼(Eton)의 운동장에서 쟁취되었다’고 했고 19세기 말 해로(Harrow)의 교장이었던 웰던은 ‘용기, 에너지, 끈기, 자기통제, 기율, 협동, 단결정신 등은 단체운동을 통해 자라고 평화 시나 전쟁 시에 승리를 가져다주는 자질들이며 대영제국이 있게 된 것은 스포츠 교육의 덕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법치국가는 경찰력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국격(國格)은 홍보나 경제성장만으로 올라가지 않는다. 중등교육은 미래 한국사회의 기풍과 국격을 정해 나가는 것이다. 만약 지금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하루 한 시간만이라도 책 읽는 습관을 익히고 스포츠를 통해 건강한 신체뿐 아니라 자기통제와 협동의 습관을 익힌다면 지금의 교육제도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미래 한국에 대해 낙관할 수 있을 것이다. 전교조가 바로 이런 운동에 앞장서면 어떻겠는가. 그리고 기왕에 정부가 재정확대 정책을 편다면 중·고등학교 도서관을 신간 서적들로 가득 채울 수는 없을까.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된다면 미래 한국뿐 아니라 현재의 한국도 위대한 나라다.

조윤제 서강대 국제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