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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초식국가 육식국가
작성자
박정훈
작성일
2010/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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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없음

‘草食국가’ 일본, ‘肉食국가’

한국박정훈·사회정책부장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기사 100자평(0) 입력 : 2010.02.24 22:32 / 수정 : 2010.02.25 01:57

▲ 박정훈·사회정책부장

도요타 사태와 일본항공(JAL)의 몰락, ‘잃어버린 20년’….

수수께끼 같은 일본 침체의 미스터리를 한두 줄로 요약하려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짓이다. 다만 약간의 무모함을 용서받는다면 이런 가설이 성립할 것 같다.

“일본이 ‘초식(草食)국가’ 체질로 바뀌었다!”

초식동물이 있고, ‘초식남(男)’이 있다면, 나라에 초식계(系)가 없으란 법은 없다.

초식국가란 요컨대 평화로운 성숙 국가다. 사회는 조용하고 사람들은 온순하며, 경쟁보다 공존을, 공격적 확장보다 현상 유지를 선호한다. 좋게 말하면 평화 공존형이고, 나쁘게 말하면 도전 의욕이 떨어지는 사회다.

지금 일본의 상황은 초식국가의 정의에 딱 맞아떨어진다.

밖을 향해 치달리는 진취성이 약해져 사회 분위기는 갈수록 내향화(內向化)하고 있으며, 젊은이들이 초원의 양떼처럼 양순한 소시민이 돼간다고 일본 지도층은 개탄한다.

일본의 초식화(化)를 나타내는 징후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일본에선 ‘초식남’이라는 남성 신인류가 탄생해 2030세대의 대세가 돼가고 있다.

공격적 남성성이 거세된 일본의 초식남들은 출세·승진 경쟁엔 관심이 없고, 취미와 패션, 자기 꾸미는 일에 몰두한다.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살아가는 ‘프리터족(族)’ 역시 일본이 원산지다.

수백만 명에 달한다는 일본의 ‘프리터족’에겐 정규직 일자리를 구하려는 의욕 자체가 없다. 굶어 죽지 않을 만큼만 벌어 마음 편히 살겠다는 전형적인 초식 성향을 보인다.

오늘날 도요타의 고전을 일찌감치 초식국가 패러다임으로 예견한 사람이 있었다.

도요타가 절정을 구가하던 2001년, 오쿠다 히로시 당시 도요타 회장은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본은 ‘헝그리 정신’을 잃었다.
이대로라면 일본은 망한다. 도요타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엄살도 심하다 싶었으나 사실 여기에 해답이 담겨 있었다.

천하의 도요타가 치욕적인 리콜 사태에 몰린 것은
모든 것을 던져 최고가 되겠다는
‘천하제일’ 정신, 장인(匠人) 정신이 시들해진 결과다.

헝그리 정신이란 곧 육식(肉食) 기질이다. 20세기 초 일본은 탐욕스러운 제국주의 육식국가였고, 패전 이후엔 악착같은 ‘서구 따라잡기’ 전략으로 세계 최강의 국력을 이뤄냈다.

그러나 지금 일본의 글로벌 존재감은 약하기만 하다. 편견일지 모르나,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도 일본 선수들에겐 선배 세대 같은 악바리 근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치로가 “한국이 30년은 일본 야구를 넘보지 못하게 해주겠다”며 으르렁대던 독기를 찾을 수 없다.

한국 선수들은 달랐다. 갓 스물을 넘긴 선수들이 꼭 이기겠다는 치열한 성취욕구를 펄펄 발산하고 있다. 어린 선수들 발에 못 박인 굳은살은 그들이 얼마나 가혹한 훈련을 소화했는지, 목표 의식이 얼마나 강렬했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일본형 초식국가 모델이 나쁜 것만은 아닐 것이다.

덕분에 일본 국민은 덜 부대끼고 스트레스 덜 받으며 살아갈 수 있다.

반면 한국은 팽팽 돌아가는 육식형 경쟁사회이고 입시·입사·승진 등에서 숨 가쁜 경쟁에 노출돼 있다. 어느 쪽이 더 행복하냐고 반문하면 할 말은 없다.

그래도 가진 것 없는 우리가 이만큼 사회활력 유지하고 금메달도 펑펑 따내는 것은 경쟁 체질을 잃지 않은 덕이다. 건강한 육식 본능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밴쿠버의 어린 선수들이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