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 포퓰리즘’의 재앙’ [중앙일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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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12 02:50 입력 / 2010.02.16 03:40 수정
한국보다 잘사는 나라 소방헬기 한 대 없어
그리스 정부의 재정 긴축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10일(현지시간) 아테네의 유럽연합(EU) 사무실 앞에서 EU 깃발을 불태우려 하고 있다. [아테네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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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8월 그리스는 동부에서 난 대형 산불로 국가위기 상황에 처했다. 불길은 고대 유적이 밀집해 있는 수도 아테네까지 밀려왔지만 그리스 정부는 속수무책이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소방용 헬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프랑스·오스트리아 등 주변 11개국에서 헬기를 빌려줘 겨우 불길을 잡았다.
대형 산불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2007년 전국적 산불로 100명 이상의 그리스인이 숨졌는데도 2년 동안 대비가 없었던 것이다. 지난해 총선에서 집권 신민당이 사회당에 패배하자 외신들은 산불 문제가 패인 중 하나라고 보도했다.
그리스는 소방 헬기 몇 대를 못 살 정도로 가난한 나라가 아니다.
지난해 국제통화기금(IMF) 자료에 따르면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2만8650달러로 세계 40위다.
49위인 한국(2만1570달러)보다 낫다.
게다가 그리스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재정 규모 비율이 유럽연합(EU) 27개국 중 가장 높다. 현 경제위기의 핵심인 재정적자 규모(GDP의 12.7%)에서 드러나듯 정부는 빚을 내서라도 과감하게 돈을 써왔다.
그렇다면 헬기 문제는 어떻게 된 것일까.
그리스 민간 연구기관인 국제경제관계연구소(IIER)의 샤랄람보스 차르다니디스 소장은 “정부 예산 규모가 비록 크지만 대부분이 공공부문 임금과 연금·보조금으로 쓰여 늘 재정적 여유는 없다”고 설명한다.
“정부가 미래를 대비하는 투자보다는 당장 국민의 주머니를 채우는 일에 급급했다”는 것이다.
그리스는 공공부문이 전체 경제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특히 사회보장비용이 GDP의 18%에 해당한다.
정부가 국가 인프라나 산업에 투자하기보다 국민의 생활비 충당에 많은 돈을 써왔다는 얘기다.
이러한 정책은 제조업을 허약하게 만들었다.
그리스는 GDP의 73%가 서비스업 등의 3차 산업에서 나온다. 2차 산업의 비중은 23%에 불과하다.
그 결과 한 해 평균 350억 유로(약 56조원)의 무역적자가 발생했다.
올리브·엽연초 등의 농산물 말고는 이렇다 할 수출품이 없는 탓이다. 예컨대 그리스는 지난해 약 26억 달러(약 3조원)어치의 한국 상품을 수입했지만 대한국 수출액은 1억 달러에 불과했다.
그리스 주재 한국대사관의 김득환 참사관은 “한국 정부는 무역수지의 불균형을 줄이려 노력하고 있지만 수입할 만한 게 별로 없다”고 말했다.
그는 “그리스 정부의 재정 적자 규모가 드러나면서 이번에 위기가 닥쳤지만 사실 무역수지 적자가 더 큰 문제”라고 덧붙였다.
그리스 정부가 국가 인프라나 산업시설 투자보다
국민의 생활 보장을 중시해온 건 사회주의적 이념이 득세해 왔기 때문으로 분석되고 있다.
그리스는 1944년 독일 점령에서 해방된 뒤 좌·우파로 갈라져 내전을 벌였고, 군사 쿠데타로 67년부터 7년간 군부정권이 들어섰다. 한국과 유사한 길을 걸은 셈이다.
하지만 한국의 군사정권은 산업화를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 반면 그리스 군사정권은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더욱이 74년 민주화 이후 36년 중 3분의 2가량인 22년을 사회당이 집권했다.
중도보수 성향의 신민당이 10여 년에 걸쳐 세 차례 집권해 공기업 민영화·사회보장 축소 등의 경제 개혁을 시도했지만 국민의 반발 속에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결국 사회보장은 북유럽의 사회민주주의 국가 수준이지만 다른 산업구조 및 인프라 등에서는 동유럽 국가와 비슷한 형편인 것이다.
그리스 시내에서 만난 회사원 스테리아노스 안텔리스는 “정부가 돈을 많이 써서 위기가 왔다고들 얘기하지만 문제는 단순히 돈을 많이 쓴 게 아니라 어디다 썼느냐다. 투자가 아닌 소비에 집중된 것이 진짜 문제”라고 지적했다.
◆EU, 그리스 지원 가닥=유럽연합(EU)이 11일(현지시간) 재정위기에 빠진 그리스를 지원하기로 가닥을 잡았다.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긴급 EU 정상회의에서다.
그리스의 대출에 대한 지급 보증, 그리스 채권 매입 등이 거론됐다. 구체적인 내용은 15일 열리는 재무장관 회의에서 확정된다. 폴란드처럼 국제통화기금(IMF)에서 직접 지원을 받는 방법을 영국이 주장했지만, 독일과 프랑스가 반대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등은 회의 전 그리스 대책에 공동으로 대응할 것을 합의했다. 독일과 프랑스는 이미 그리스에 각각 430억 달러와 750억 달러를 지원했다.
아테네=이상언 특파원, 김경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