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도(赤道)의 꽃
설원(雪原)의 향연은 이제 막을 내렸다. 다시 적막 같은 시간만이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4년여 시간을 저마다의 고독과 싸워 이겨야 그래도 한 번 소리 높여 웃고 울을 수 있다. 스포츠인으로 인정받는 다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다.
하지만 각자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어 선택한 길이기에 받아들인다. 좋아서 시작한 길이기에 묵묵히 연습에 임한다. 아니 어쩔 수 없이 선택했기에 그냥 다시 일어나 뛸 수 밖에 없다. ‘하늘의 별’을 따고 싶은 심정으로 지친 몸, 아픈 몸을 추스르고 다시 스트레칭을 한다. 저마다의 ‘꿈’이 있기 때문이다.
올 초에도 축구와의 인연으로 완도와 제주에서 열린 춘계 유소년 축구대회에 참여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선수와 학부모들의 열의는 뜨거워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매년 관광을 하기 위해 찾기도 힘든 곳을 오로지 자식의 꿈을 돕기 위해 함께하고 있다. 그 정성을 누가 알랴. 경기 종료까지 아들의 몸동작 한 순간 한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 하는 부모들을 볼때 스포츠인으로서 미안하기만 하다.
대회를 유치하는 자치단체의 배려가 아직도 부족하다. 전지훈련과 겸해 따뜻한 남쪽에서 대회를 열고 선수들의 기량을 돕기 위한 취지를 모르는 바 아니다. 대회기간 동안이라도 선수와 학부모를 위한 작은 배려를 해야 하지 않는가라는 의구심이 든다. 협회 역시 그런 배려가 없으면 왜 그곳까지 가서 경기를 해야 하는가. 특별기를 띄우라는 것은 아니다. 일을 하는 사람들이 그들을 위한 최소한의 역할은 해야 한다.
먼 곳까지 가서 한 번도 이기지 못한 선수와 학부모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 아니 생업을 포기하고 갈 수 밖에 없는 부모들의 입장을 생각해줘야 한다. 부모의 관심 부족과 어려움으로 혼자 뛸 수 밖에 없는 대다수의 어린 선수들의 아픔을 왜 알면서 방치하는가. 악순환(惡循環)을 언제까지 되풀이해야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밴쿠버의 별’ 김연아도 무명(無名)선수에 불과했다. 매스컴과 스포츠계가 그를 향해 주목한 것은 불과 3년 정도이다. 그가 힘든 시간을 견딜 수 있고 실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든든한 부모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부모님의 뒷받침이 없었다면 그의 재능을 인정받기도 힘들었을 것이고 유능한 지도자를 만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선수 혼자서 이룰 수 있는 꿈이 아니기 때문이다.
운동을 선택한 선수들 대부분은 김연아 선수처럼 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김연아 선수와 같은 부모는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젠 사비(私備)를 털어 선수를 육성시킬 교만한 지도자도 기대할 수 없다. ‘적도(赤道)의 꽃’을 피우기 위해선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 종목별 보다 현실적인 선수 지원책이 필요하다.
어느 누가 온 국민을 그렇게 긴장시킬 수 있겠는가. 바로 가슴에 태극 마크를 달고 꿈을 향해 질주하는 스포츠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른바 형설지공(螢雪之功)의 뜻을 세워 법조계에 입문한 사람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아니 동네 어귀에 현수막에 나부낀 ‘동네의 자랑’ 이었던 어떤 인물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온 국민들을 잠 못 이루게 한 태극전사(太極戰士) 들만이 할 수 있었다.
설원(雪原)을 달리고, 비상(飛上)하는 그들의 모습이 마치 적도에 핀 꽃처럼 아름다웠다■
김희수 칼럼니스트
<2010. 3. 9. 중부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