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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경기도체육인회 정기철 회장
작성자
경기도체육회
작성일
2013/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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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체육인회 정기철 회장
“86년 전국체전 우승후 ‘체육웅도’ 기틀 … 선수들 인성교육 중요성 절감”


“늙은이가 무슨 기사거리가 된다고 인터뷰를 해. 내가 그럴 자격이 있나?”
경기도가 지난 1981년 인천시와 분리된 직후 경기도체육회 초대 사무처장을 맡아 무려 16년간, 또한 부회장으로 5년간 봉직하는 등 지난 20여년 동안 경기체육 발전의 초석을 다져 온 정기철(80) 경기도체육인회 회장.


그의 이름 석자 앞에는 항상 ‘경기체육의 산증인’ 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을 정도로 오늘날 경기도가 ‘체육웅도’라 불리며, 대한민국 체육을 앞장서 이끌고 나가는 토대를 마련한 주역이다. 특유의 뚝심과 추진력을 바탕으로 경기도 체육을 반석위에 올려 놓은 정 회장을 지난 25일 오전 경기도체육인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처음에 인터뷰를 완강하게 거부한 정 회장은 기자의 설득 끝에 말문을 열었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바로 경기체육의 역사였다.


-어려운 시기에 경기체육의 행정 수장을 맡으셨는데.
1981년 1월 인천시가 광역시로 승격돼 경기도가 분리되면서 그해 7월 초 갑자기 경기도체육회를 맡아달라고 연락이 왔어. 당시만 해도 경기도체육회가 인천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인천으로부터 넘겨받은 것은 달랑 체육회旗 한 개가 전부였어. 직원이나 서류 한장 없이 체육회를 만들어 3개월 뒤에 열리는 전국체전에 출전하라는 거야. 참가신청 마감은 9월 초인데 참으로 난감하더만. 가맹경기단체도 모두 인천에 있었기 때문에 경기도에 있는 단체라고는 조정협회 딱 한 종목 뿐이었어. 하지만 어쩌겠어. 당시 추상같던 도지사의 명령이니 안할 수도 없고….


-단기간 체육회와 가맹단체, 전국체전 선수단을 꾸리는데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
이쪽에 경기도체육회 일을 했던 분이라고는 임영석씨(전 도체육회 부회장) 한 분 밖에 없었어. 그 분의 조언을 들어가며 몇몇 사람들을 모아서 당시 수원운동장 토담 밑에 방 하나를 마련해 사무실로 썼지. 사무실이라야 책상 하나에 의자도 긴 나무의자가 전부였어.


다른 사람들은 체육에 관여됐던 사람들을 모아 경기단체를 만들고, 나는 전국체전 선수 구성을 위해 각 대학들을 찾아다니며 체육 동아리들에게 체전 출전을 부탁했어. 꼴찌는 면하자는 생각에서 참가점수라도 얻기 위해 대학 동아리들을 출전시키려 한 것이야. 우여곡절 끝에 27개 전종목의 팀을 꾸려 제62회 전국체전에 첫 출전했는데 13개 시ㆍ도 가운데 7위를 했어. 가맹경기단체도 지사님이 기업인들을 직접 지정해 맡도록 하면서 1년 내에 33개 종목 모두 구성을 마쳤어.


-이후 불과 5년 만에 전국체전 우승을 이끌 수 있었던 비책은.
첫 해 7위를 차지한 뒤 2년 연속 한 계단씩 올랐는데 83년부터 3년 연속 5위에 머물렀던 거야. 원인을 분석해보니 당시 구기 종목은 경기도에 연고를 둔 실업팀들 때문에 좋은 성적을 냈는데 수영, 사격, 펜싱, 요트 등 비인기 종목들이 문제였어.


생각 끝에 성적도 올리고, 당시 일반부로 활동하던 선수들의 향후 직장도 마련해줄 겸 도청과 시ㆍ군청 직장운동부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지사님께 건의를 드렸지. 지사님이 당시 36개 시장ㆍ군수들을 모아놓고 재정 형편에 따라 1~2개 팀씩 창단을 지시한 것이 전국 최초의 시ㆍ군 직장운동부야.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아이디어 였고, 그 결과 인천 분리후 5년만인 86년 우승을 할 수 있었지.


-이후 큰 어려움 없이 탄탄대로를 달려온 것인가.
그렇지만도 않아. 80년대 초반에 국군체육부대가 경기도로 뛰겠다고 연락이 왔어. 처음에는 몇몇 종목만 경기도로 뛰었는데, 이후에 구기종목 모두 선발전을 거치지 않고 경기도로 뛰게 해달라는 거야. 당시 군사정부 시절이어서 거절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어.


경기도로 출전했던 한국화장품 야구와 여자농구, 삼성전자 남자농구, 금성사 배구팀, 경희대 남자 핸드볼 팀들을 설득하느라 욕도 많이 먹었지. 타 시ㆍ도로부터 비난도 많이 샀어. 86년 이후 우승 이후 서울과 한번씩 우승을 주고받으며 상승세를 탄 것은 사실이야. 95년 첫 2연패를 달성하며 서울과의 양강구도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 11연패 달성으로 이어졌지. 경기체육이 연승가도를 달린 데에는 임창열 지사님 취임 후 체육회 예산을 획기적으로 늘려 지원한 것도 빼놓을 순 없지.


-재임 중에 체육인들의 숙원인 경기도체육회관도 건립했는데.
처음에는 수원상공회의소 건물에 세들어 살았어. 당시 전세금 2천만원이 없어 자주 독촉을 받으면서 ‘안되겠다’ 싶어 지사님께 3층자리 건물이라도 지어서 체육회와 가맹경기단체 사무실들을 입주하게 해달라고 건의드렸어.


당시 임사빈 지사님께서 경기도에서 전국체전을 유치하니 기념 뺏지를 만들어 기금을 조성하라고 하셨어. 하지만 잘 팔리지가 않자 지사님께서 확대 간부회의에 참석하라고 하시더라고. 당시 내무국과 농림국이 우수행정으로 상금을 탔다고 자랑하자 “상만 타면 뭐하느냐. 그것을 도민들이 알기나 하느냐”면서 “체육은 우승하면 구두닦이부터 전도민이 좋아한다”고 전국체전 총력 지원을 지시하셨어.


또한 시장ㆍ군수 회의를 열어 뺏지 판매를 독려하시고는 매일 결과를 보고 받겠다고 해 당시로서는 큰 돈인 13억원이 모금됐지. 관선지사 때니까 가능했던 일이야. 그렇게 해서 뺏지 판매금 13억원과 자체 기금을 모아 현 수원 정자동 도유지에 지으려는 데, 규모가 10층으로 커졌더라고. 부족분은 도에서 지원키로 해 73억원을 들여 92년 5월에 지어진거야.


-16년간 사무처장 재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에피소드야 많지. 그 가운데 전국소년체전 총감독을 교육청이 아닌 내가 맡았던 때가 있었어. 83년으로 기억하는데 당시 꼴찌에서 두번째를 했는데 ‘경기도 얼굴에 먹칠을 했다’고 욕을 많이 먹었어. 오죽하면 목욕탕에도 가질 못했으니까. 경기도민들의 체육에 대한 관심은 대단했어. 역전경주가 열릴 때면 평택부터 서울 경계까지 연도에 사람들이 꽉찰 정도였어. 경기도 구간을 달릴 때 1등을 못하면 욕설도 퍼붓곤 했는데 그게 경기체육이 발전하는 원동력이었어. 또한 전국체전서 우승하면 우승컵이 워낙 무겁고 커서 사진기자들이 들고 있으라고 요청하면 손에 쥐가 날 정도였어. 그래서 체전을 앞두고는 팔굽혀펴기로 힘을 길렀는데, 우승을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더라고.(웃음)


-2008년 경기도체육인회 초대 회장을 맡아 연임을 하게됐는데.
사실 나는 회장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거야. 체육인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 회장을 맡는 것이 옳았지. 나는 고문 정도만 생각했는 데 체육인들의 요청이 완강했어. 사실 체육인회 회원 대부분이 나이가 많아 경제적인 능력도 없기 때문에 무슨 사업을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잖아. 다행히 체육회에서 보조금을 줘 유용하게 쓰곤 있는데 경기체육에 오래 몸담았던 사람들로서 경험담을 들려주고, 후배 체육인들에게 조언이나 해주면서 체육인의 표상만 돼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해.


-경기체육 발전을 위해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체육계가 선ㆍ후배 위계 질서가 무너지고, 서로 보듬는 분위기가 사라진 것이 아쉬워. 그동안 경기체육이 인성을 가르치지 않고, 경쟁력과 성적만을 키워준 결과 때문이야. 인성교육 과정이 있어야 올바른 선수를 키울 수 있어.


또한 도체육회를 이끄는 사무처장 자리가 아무리 도 산하단체라도 인사적체 해소방안으로 활용돼서는 안돼. 50개가 넘는 가맹단체를 이끌려면 경기 종목의 특성 파악과 선수ㆍ지도자들을 익히는 데 몇년은 걸려야 해. 누가 오던간에 4~6년은 재임해야 체육회를 올바로 이끌 수 있고, 중앙 단체와의 관계도 원활하게 유지하려면 시간이 필요해.


체육회도 오래 고생한 경기단체 임원들에 대한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램이야. 은퇴한 체육인에 대한 예우와 관심이 필요해. 그 몫은 현역에 있는 사람들의 것이야. 전국체전에서 우승만 하면 자기들이 잘 해서 이뤄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전임 도지사들과 선배들이 닦아놓은 터전 위에서 얻어낸 열매라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돼.(경기일보)